무거운 십자가 지고도 마냥 행복한 젊은 수도승

(가톨릭평화신문)





토마스 머튼의 수도생활은 초기(1941~1950년 초반)와 과도기(1950년대 중반~1958년), 그리고 후기(1958~1968년)로 나눌 수 있다. 이는 그의 초기 작품들과 후기 작품들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1940년대 시토회 수도승이자 사제가 되기 위한 그의 양성은 관상적 공동체 삶을 살아가기 위한 전통적인 가르침과 엄격한 수행에 기초해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일어난 의식의 변형과 하느님 체험은 그의 내면에 고독을 통한 하느님과의 일치에 대한 더 깊은 갈망이 솟아나게 했다. 그리고 1960년대의 머튼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머튼의 영적 성장과 변화는 관상적 깨달음을 통한 한순간의 의식 변형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의 일상적인 수도생활의 기도, 명상, 단식, 공동체 생활, 고독, 침묵 그리고 자기 성찰 역시 더 성숙한 영적 삶의 성장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는 것 또한 강조되어야 한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밤기도와 관상적 기도를 시작으로, 렉시오 디비나, 아침기도, 3시경, 6시경, 9시경, 저녁기도와 끝기도를 바치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수도승들은 기도의 사이사이에 일을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세상의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신 예수님과 같이 수도생활의 고행은 그들에게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요, 세상의 구원을 위한 의인의 길(창세 18,20-33)이라고 여겼다.



고행의 수도생활을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여겨

트라피스트 수도원 입회 전부터 머튼은 이러한 수도원에서 고행의 삶을 가장 이상적인 천국에서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느님의 가난한 형제들’은 독방에 숨겨진 만나,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무한한 양식과 힘, 은밀한 영광을 마음속으로 맛본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감미로운 환희를 맛보는데 이는 하느님의 실존과 첫 번째 내밀한 접촉, 곧 이 세상에서 체험되는 천국의 시작이다.”

그의 초기 수도원에 대한 생각은 수련장과 그의 수도원 입회 면담에서도 잘 드러난다. 수련장이 머튼에게 물었다. “침묵이 겁나지 않나요?” 그러자 그는 “침묵은 무섭지 않습니다. 오히려 침묵에 도취되어 있으며, 벌써 천국에 와 있는 기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수련장이 머튼 방에 열린 창문을 보고 “여기가 춥지 않나요? 창문은 왜 열어 두었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머튼은 용기를 내어 씩씩하게 “이만한 것쯤은 견딜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사실 그는 손님 담당 수사가 고행과 극기를 위해 수도원에는 난방시설이 없기 때문에 무척 춥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추위에 미리 대비하기 위해 창문을 열어 놓고 윗도리를 입지 않고 이것을 견디는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는 아주 심한 감기에 걸려 고생을 했다고 회고한다.



영웅적 우월감에 젖어 수도원 규율 엄격히 준수

필자는 이 일화가 머튼의 1940년대 수도생활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그는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고행과 엄격한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해 영웅적인 우월감에 젖어 있었고, 그것이 천국과 같은 수도원에서의 삶이라고 여겼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보속과 대속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 그래서 그는 전통적인 수도승적 수행에 따라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수도원의 규율을 엄격히 준수했다.

수도원 울타리 안에서, 일상의 영적 훈련은 하느님에 대한 관상적인 깨어남을 조성해 주었다. 그는 수도생활이 초자연적인 신적 은총을 얻기 위한 완벽한 길을 제공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수도생활을 찬양하였다. 그는 “만약 행복감이 단순히 자연적 선물들의 문제라면 어른이 되었을 때 절대로 트라피스트수도원에 입회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생각은 하느님과의 내적 만남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점점 변화되어 간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