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직현장에서] 친구 수사와 함께 간 마더 데레사의 성지

(가톨릭평화신문)
▲ 김성태 신부



하루에 한 번씩은 큰비가 내렸다. 장대처럼 뻗은 물줄기가 한바탕 요동을 치고 나면 영락없이 살랑 바람이 기분 좋게 맨살을 도닥였다. 이것이 태초로부터 한여름의 콜카타가 살아가는 방식이리라. 비 때문에 ‘마더’의 집으로 가는 길이 진창이 되어버렸다.

못가 길로 가면 5분 만에 가는 거리를 멀찌감치 돌아서 ‘마더’의 수도원에 도착했다. 내 새 신이 더럽혀질까 봐 친구 수사가 돌아서 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흰 사리를 둘러 입은 세 분의 ‘마더’가 우리를 환영했다. 찬찬한 어투의 조셉 수녀님이 원장이다. 사진에서 본 마더 데레사의 주름이 겹쳐 보이는 수녀님은 이내 우리를 옆집으로 데려가 쉼표도 없이 손짓까지 섞어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말이 빠르지 않은 덕에 ‘오케이, 마더 데레사, 땡큐’ 등은 거의 빼놓지 않고 알아들었다. 나머지는 친구 수사가 재차 설명해 주었다.

그렇다. 여기는 자연인 마더 데레사가 처음으로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 시작한 장소였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마더’(사랑의 선교수녀회원)의 고향일 테고, 마더의 손을 통해 복음이 실현된 기적의 장소일 터다. 골목길이 마당이고, 부엌이고, 현관인 효율적인 흙집은 지금도 어느 가난한 가족이 살고 있었다. 70년 전 즈음에는 버려진 사람들을 마더가 모시던 방이었고, 골목길은 21명의 어린이가 공부하던 학교였다. 흙바닥을 칠판 삼아 힌디말 ‘가나다’를 써가며 글을 가르쳤단다.

수녀님의 가슴에서 이곳은 성지나 다름없는 마더의 자취였다. 한 여인이 ‘마더’로 다시 태어난 생가라면 틀린 말일까. 그제야 친구 수사가 단둘이 이곳에 오자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날 아침 그는 ‘사랑의 선교 수사회’(M.C.) 수도자로 종신서원을 했다. 또 하나의 ‘마더’로 다시 태어난 그의 간절함이다.

마더의 첫 자취를 자신의 첫 마음에 새기고 싶은 친구 수사의 간절함을 눈치로 조금은 알아들었다. 저녁에 침대 밑에 벗어 둔 깨끗한 신이 오늘은 왠지 쑥스러웠다.



김성태(대전교구 솔뫼성지 전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