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직현장에서] 가정 폭력에 시달린 여성들에게 자신감을!

(가톨릭평화신문)
▲ 박경옥 원장



우리나라는 1970년대 이후 산업화로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됐고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 이면에는 빈부격차 심화라는 부작용도 공존했다. 당시 사회복지제도 역시 사실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열악한 상황 속에서 막 자리를 잡아나갈 시기였다.

당시 여성의 집 주변이 공단지역이라 노동자 문제로 자주 시위가 발생했다. 이곳 사정을 잘 아시던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개원 날 나를 부르시어 “오늘 여성의 집을 개원했지만 5년간 간판을 문밖에 걸지 말고 집 안에 걸어 놓는 것이 어떨까요?”라고 물으셨다. “좋은 일도 외부에서 보면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일을 못 하게 방해할 수도 있으니 자유롭게 찾아오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셨다. 나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즉시 대답했다.

개원 미사 후 간판을 걸지 않았지만, 교회 언론과 잡지에 기사가 나간 후부터 서울 여러 지역의 가난한 여성들이 두셋씩 짝지어 찾아오고, 시간과 상관없이 전화도 온종일 울렸다. 여성의 집을 통해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가정 폭력, 매 맞는 여성, 가출 부녀자 문제가 밖으로 노출된 것이다.

찾아온 대부분 여성은 서울 변두리 달동네에 사는 이들이었다. 남편 대다수는 긴 무직 생활과 알코올중독으로 술을 마시면 자신의 불만을 아내를 때리는 것으로 풀었다. 그들은 갖은 도구로 아내를 매질하고 기물을 파손했다. 당시 1980년대만 해도 여성은 가정 폭력에도 자녀들 때문에 참고 살았다.

매 맞는 여성들에게 다시는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일이 없도록 가정과 자신을 찾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삶의 용기를 주기 위해 자기 일을 갖게 하고 자기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최우선으로 도왔다.

개원 때부터 한가지 원칙이 있었다. 가톨릭 신자는 물론 비신자도 성직자나 수도자의 추천서를 받아오도록 했다. 교양교육이나 신앙(영성)교육 내용을 이해하고, 실제로 일자리를 안내받았을 때 어느 곳에 가든지 신앙인으로서 도덕적으로 안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일터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여성의 집에서 책임져야 하므로 신자 증명서와 주민등록 등본 등의 서류가 필요했다. 그것은 곧 그 사람의 삶을 품기 위한 신뢰보증서와도 같은 것이었다.



박경옥(모니카, 서울 가톨릭 여성의 집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