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자아 찾으면 예수님 마음으로 세상 사랑

(가톨릭평화신문)
▲ 그림=하삼두 스테파노



지난 호에서 우리는 관상과 연관된 세 가지 체험 가운데 ‘하느님을 찾는 체험’에 대해 살펴보았다. 관상을 통해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숨어 계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동안 몰랐던 하느님의 다른 면을 깨닫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은 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의 체험은 무엇보다 자신의 자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했고, 자아를 그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머튼의 ‘루이빌 체험’은 자신의 내면에서 예수님과 일치를 체험한 이들이 어떻게 세상과의 관계가 변화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번 호에는 관상과 관련하여 ‘참된 자아를 찾는 체험’과 ‘세상과의 관계 체험’에 대해 다뤄 보자.



‘거짓 자아’에 대해 죽고 ‘참된 자아’를 찾는 것


머튼은 자신의 여러 저서에서 관상은 ‘거짓 자아’(the false self)에 대해 죽고 ‘참된 자아’(the true self)를 찾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예를 들어, 「새로운 사람」(New Man)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관상의 체험은 우리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삶과 현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체험은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초월적 원천에 대한 체험입니다. 관상은 자신의 가장 은밀한 자아의 바로 그 중심에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신비입니다. 그분의 현존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에게 갑자기 다가올 때,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다음 우리의 참된 자아를 찾게 되는) 홍해의 갈라짐을 통해 신비스럽게 그곳을 지나가게 됩니다.”

머튼에게 있어 관상의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짓 자아에 대해 죽고 참된 자아로 다시 태어남이다. 여기서 거짓 자아는 경험적인 자아, 피상적인 자아, 혹은 외적이고 표면적인 자아를 말한다. 반면, 참된 자아는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자아를 의미한다. 머튼은 하느님 안에서 그분이 주신 본래의 자아를 찾는 과정이 바로 관상의 길이라고 보았다. 관상은 피상적이고 외적인 ‘나’가 사실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고, 관찰과 반성의 범주를 넘는, 설명할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 ‘나,’ ‘참된 자아’를 자각하는 것이라고 머튼은 강조하였다.

이러한 머튼의 참된 자아를 찾는 관상의 길에 대한 가르침은 자기중심적이고 물질 중심적인 오늘날 우리 시대에 관상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참된 자아를 회복한 이는 자신의 이기적인 자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자신을 오히려 잃어버림으로써 내 안에 있는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자아를 회복한 이들이다. 그래서 더는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게 된다. 자신만을 사랑하며 사는 이들이 아니라 자신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며 살게 된다. 모든 재물이나 권력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임을 알기에 이에 대해서도 자유롭다. 하느님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고 나누며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것은 예수님의 것이요, 예수님은 자신 안에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랑의 열매가 없는 관상은 울리는 징에 불과


여기에 바로 관상의 길에서 자아와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관상을 통해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깊은 신비를 체험할 때, 우리는 이웃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각각의 이웃은 하느님의 관점에서 모두가 고유한 존재들이며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들이 아니며 동시에 서로가 깊이 연결되어 있다. 모든 이들은 맞물려진 관계의 네트워크 안에서 함께 이어져 있고, 우리 모두는 사랑의 숨겨진 근원이신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참모습과 고유함을 발견하게 된다. 서로의 다양성 안에서 각자가 사랑으로 더 깊이 나아갈 때 사랑이신 하느님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우리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음을, 하느님 안에서 다른 모든 이가 같이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이 ‘상호 의존’이라는 감각과 우리가 그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상호 책임’이라는 새로운 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따라서 참된 관상은 사회 정의와 염려에 대한 감각을 중단할 수 없게 된다. 머튼에게 있어 이것은 ‘깨달은 자의 책임감’이다.

사랑의 열매가 없는 관상은 울리는 징에 불과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관상의 깊은 체험을 한 이가 사랑과 자비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는 그릇된 관상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더 깊이 하느님을 체험할수록, 더 깊이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랑은 경계를 넘어간다. 나와 다른 타인뿐만 아니라 자연과 피조물들로 이어지게 된다. 보편적이고 조건없는 사랑이 하느님의 본성이듯이 관상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한 이들도 그렇게 사랑으로 성장해 나가는 이들, 사랑이 되어가는(becoming love) 이들이다.

머튼의 다음 말은 관상의 상태를 참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기쁜 마음으로 그분의 뜻에 동의하고 기꺼이 그분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나는 그분의 사랑을 내 마음에 간직합니다. 이제 내 뜻은 그분의 사랑과 같고 사랑이신 그분이 되는 길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그분의 기쁨을 내 영혼에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이는 것 그 자체 때문이 아니고 하느님은 계시는 그분이시며 그분의 사랑이 모든 것 안에 나의 기쁨이 있기를 의도하셨기 때문입니다.”(「새 명상의 씨」, 33)


▲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