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사순 제4주일 - 고통 속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

(가톨릭평화신문)
▲ 임상만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눈먼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자기 탓이나 부모의 탓이 아님에도 날 때부터 눈이 안 보이는 고통을 당했다. 무릇 성경에는 이런 시련과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세 가지로 나온다. 첫째로,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한 대가이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 가에 있던 병자를 고쳐주시며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고 당부하시는 말씀을 들어 알 수 있다. 둘째로, 믿음의 성장을 위한 시련과 고통이다. 욥기를 보면,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며 신앙과 삶의 위기를 맞아 방황한다. 그러나 결국 자기의 고통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한 것임을 깨닫고 이를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음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드러나게 하려고 허락하신 시련과 고통이다.

길을 가던 중에 태중 소경을 발견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태중 소경이 되는 이유에 대해 물으니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라고 하신다. 기존 유다인들의 논리대로라면 지금 당하는 고통의 이유가 과거에 있으니 현재는 절망과 낙담만 남게 되지만, 예수님의 새로운 관점의 말씀으로 보면 우리가 겪는 고통 속에 분명한 하느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은 당장 어렵고 힘든 상황이더라도 하느님께서 나의 고통을 통해 역사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시련과 고통 중에도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바쿡 예언자가 바빌로니아 침공으로 유다 왕국이 망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무화과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우리에서는 양 떼가 없어지고 외양간에는 소 떼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하바 3,17-18)라고 노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언제나 하느님께서 그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 속에 일하시고 늘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고통의 상황은 하느님께서 일하심이 드러나는 은총의 현장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켜주시고 우리를 주님 앞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 쓸모 있는 일꾼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결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할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몸의 가시로 받는 고통이 너무도 커서 이를 없애주시길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다가 깨달았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비록 자기를 고쳐달라는 기도의 응답을 받지는 못했지만, 주님을 더 의지하고 더 겸손하게 일하라는 주님의 음성으로 도리어 기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도 매번 당하는 시련과 고통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온전히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봉헌하는 삶을 살면 주님은 연약한 우리를 통해서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신다. 어떠한 절망이나, 어떤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먼저 주님 앞에 나서면 바로 그곳이 실로암 못이 된다. 그곳에서 주님의 생명수를 마시고 바르면 눈이 치유되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 실로암은 예수님께서 그리하도록 ‘파견된 분’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임상만 신부(서울대교구 상도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