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규 수녀의 사랑의 발걸음] 9. 하느님은 우리의 쉼, 우리 피난처

(가톨릭평화신문)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 수녀원도 비켜가지 않았다. 함께 사는 동료 수녀 10명 중 7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모두의 기도와 걱정 속에 다행히 수녀님들은 완쾌됐다. 그간 프랑스는 계속 바깥출입이 제한됐다. 내가 줄곧 해오던 환자들을 만나는 것도 사실상 힘들다. 대신 산책 정도만 가능해 매일 거리를 나가 걷기 운동을 하고 있다. 걷기는 건강에 좋다.

수녀원 옆 대성당을 향해 걷는 동안 성전에서 기도하고 싶어졌다. 코로나바이러스가 프랑스에 확산되기 시작할 때 수녀원이 운영하는 양로원 어르신들은 곧장 격리 상태에 들어갔다. 미사가 중단된 탓에 수녀원 성당도 굳게 잠겼다. 기도가 필요했다. 인근 대성당에 도착하니 마침 현시대의 성체가 나를 맞아주셨다. 그 앞에선 신자들이 기도하고 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워 보이는지.

이럴 때 더욱 필요한 것은 기도다. 나도 기도하는 이들 안에 들어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신 도움을 간청했다. “이 아픔의 날들이 빨리 지나가게 해주세요.” 내가 만나온 수많은 환자도 떠올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성당 안 조금 외진 구석에서 한 신부님이 신자들의 고백을 듣고 계셨다. 내 마음도 함께 숙연해졌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고백을 들어주시겠지.

특히 젊은이 몇몇이 ‘성체 현시대’ 앞에서 기도하다가 고해성사를 하기 위해 신부님께로 계속 가고 있었다. 작은 모습일 수 있지만, 나는 이 젊은이들의 경건한 믿음에 마음 깊이 감동을 하였다. 이 시련의 때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 더 깊이 들어가는 ‘회심의 시기’임을 다시금 느꼈다.

지난 사순 시기는 특히 이탈리아의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급격히 높아질 때였다. 그때 잘 아는 형제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프랑스의 확진자 수도 연일 올라가고 있었던 터라 내 안부가 궁금하셨던 것이다. 동료 수녀님들의 확진과 완쾌 소식을 전하며 마음을 나눴다. 그럼에도 우리 수녀들은 긴장 상태에 있었다.

수화기 넘어 형제님은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사제 60명이 환자들을 돌보다가 감염되어 선종하셨다는 슬픈 소식을 처음으로 듣게 됐다. 동료 수녀님들께 이 고통스러운 소식을 전했을 때, 모두 아무 말 없이 침통해 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이탈리아 신부님들은 입원한 환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고 한다. 위급한 중에도 환자를 찾아가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집전하고, 성체도 영해 주시다가 자신들도 감염된 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성경이 대변해주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18)

신부님들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환자들을 위로했던 그 순간, 그들은 얼마나 큰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을까. 마지막까지 예수님 닮은 모습을 지켰던 신부님들이 천국에 가셨길 기도드린다. 60명의 신부님은 착한 목자, 아버지로서의 소명을 다 하시고 지금은 자신들의 생명까지 바치며 사랑하던 신자들과 부활의 크나큰 기쁨 안에 인자한 아버지 집에서 살고 계실 것이다.

시편은 노래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피신처와 힘이 되시어 어려울 때마다 늘 도우셨기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네, 땅이 뒤흔들린다 해도 산들이 바다 깊은 곳으로 빠져든다 해도 바닷물이 우짖으며 소용돌이치고 그 위력에 산들이 떤다 해도.”(시편 46,1-3)

복음서는 이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해준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