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24주일 - 계속 용서하는 것이 이득이다

(가톨릭평화신문)
▲ 임상만 신부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성경의 위경 중 ‘벤 시라’의 지혜서를 보면, 이웃이 범죄 했을 때는 두 번의 기회만 주라는 대목이 있고,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세 번까지만 용서하라고 가르친 것에 비하면 베드로는 아주 넉넉하게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상 밖의 답변을 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2절)

사실 베드로는 유다인들의 율법적 용서 개념을 훨씬 넘어서는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으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관대함을 훨씬 뛰어넘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끝없는 용서’, ‘제한이 없는 사랑’을 가르치시며 이에 대해 구체적인 예화를 말씀하셨다.

“임금이 셈을 시작하자 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끌려왔다”(24절)라는 말씀으로 하느님의 심판을 드러내신다. 한 달란트가 금 34kg 정도이기에 만 달란트는 340톤이나 되므로 이것은 결국 평생을 노예로 살아도 그 빚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돈이다. 그런데 이 종이 그 빚을 절대로 값을 수 없다는 것을 안 주인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 그리고 그 탕감 문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육의 할례를 받지 않아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골로 2,13-14).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무한한 사랑으로 서명된 빚과 죄의 탕감 문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용서는 우리가 상대방에게 무엇이라도 받으려고 하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그냥 또 하나의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그러기에 용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과 그에 대한 자비의 사랑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성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인간적이고 율법적인 의미에서의 용서가 아니라 더 차원이 높은 자비와 사랑을 통한 무조건적인 용서를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라는 말로 우리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용서받은 것처럼 남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당부하고 있다.

우리는 남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 비록 자비나 사랑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우리도 용서받았으니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고, 남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면 나도 용서받을 수 없으니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코, 갚을 길 없는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우리가 일상의 작은 것, 달랑 백 데나리온의 잘못도 용서하지 못해서 우리 빚의 탕감이 무효가 되는 어리석음은 피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선 자기 자신의 더 큰 죄, 더 큰 빚을 탕감받기 위해서 계속 용서하라는 것이다. 남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불쌍히 여겨야 우리 자신이 사랑받고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비하심 안에 영원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마르 11,25)



임상만 신부(서울대교구 상도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