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민 신부의 별별이야기] (40) 마리아가 되고 싶은 마르타 (하)

(가톨릭평화신문)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알려주신다.

첫째,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더 이상 에사우를 미워하고 야곱을 편애하는 구약의 야훼가 아니라, 자녀들을 모두 똑같이 사랑하시는 신약의 아빠 아버지라는 것이다.

둘째, 공평한 사랑이란 각자 처한 상황과 처지를 개별적으로 고려하여 가장 그에게 맞는 방식으로 도움을 주는 행동에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에 나오는 아버지는 성실하게 살아온 큰아들과 문제아로 살아온 작은아들이 결코 동등한 자식으로 느껴질 수 없었다. 같은 자식이라도 부모에게 느껴지는 자녀의 상황은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식에게 더 마음을 주는 것은 부모의 입장에서는 편애가 아니라 오히려 평등한 사랑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자녀의 심리적 상태에 따라 부모나 형제에 대해 감정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려주신다. 큰아들처럼 자신을 사랑받지 못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면 다른 형제를 향한 시기와 질투심을 갖게 되지만, 정작 자신은 불공평한 부모의 처사에 대한 억울한 감정으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같은 상황에서 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지는 않는다.

체칠리아 자매도 빚을 지고 돌아온 동생을 더 챙겨주는 부모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여유가 있어서 드린 생활비도 아닌데 그 돈으로 동생의 빚을 갚아 준 부모의 행동은 더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은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부모를 계속 돌보고 있는데, 부모의 돈을 훔쳐 달아난 동생은 오히려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현실이 좌절과 분노를 일으키고 있었다. 체칠리아 자매는 내적인 치유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체칠리아 자매에게는 자신을 위로하고 보듬어 주는 태도, 즉 자기 연민과 자기 위로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부모님이 편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따라서 지금 느끼는 이 분노와 좌절의 감정은 당연하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또한, 자신 안에서 발생하는 동생과 부모에 대한 부정적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그 생각과 감정에 죄의식이나 수치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 생각과 감정은 의지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이 생각과 감정은 죄의 범주에 해당하기보다는 성찰의 대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위로와 수용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나면 그때에야 비로소 부모의 관점에서 자신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날 수 있다. 부모의 관점을 수용한다는 것은, 부모에게 더 마음이 쓰이는 자녀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때 동생에게 더 마음을 쓰는 부모의 마음이 편애일 수도 있고 앞서 복음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평한 사랑의 행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체험되는 중요한 변화는 더 이상 그러한 구별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 마지막으로 자기 연민과 자기 위로를 기반으로 한 자기 돌봄이 시작될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자신의 부정적 감정이 부모의 말과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 존재로 느껴지는 심리적 상태에서 발생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통찰은 부모에 대한 원망과 기대를 넘어서서 자신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고 또한 자신이 어떻게 사랑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적인 방법을 찾는 영적 여정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중요한 이웃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그리고 하느님과의 초월적 만남을 통해 결핍된 사랑을 조금씩 채워나가게 된다. 결국, 사랑의 결핍은 사랑의 충만을 향한 영적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