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자 수녀의 하느님의 자취 안에서] 8. 하늘이 주신 일

(가톨릭평화신문)


늦은 장마가 시작되어 매일 비가 내리고 있다. 잠시라도 비가 멈추면, 우리는 밭으로 나가 농작물들에 안부 인사를 하러 간다. 짧은 햇볕이라도 나오면 농익은 참외랑 수박, 토마토, 오이 등을 딴다. 어떤 열매도 볕이 있을 때 수확하면 떨어지는 가지 부분이 소독되기 때문에 그때를 잘 맞추는 것도 지혜이다. 오늘도 바구니 한가득 열매를 땄다. 그런데 고추밭에서 고추가 아우성이다. 이유인즉슨, 자기 얼굴이 너무 빨개졌으니 어서 따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명의 소리를 듣는 것은 부지런한 손길이 필요하다. 그들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으로 잘 들으면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농부는 항시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처음 이곳에 와서 농사를 짓는다고 했을 때에, 아버지께서는 걱정하시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농사는 하늘이 주신 일이여. 사람의 힘으로만 하는 일이 아니여. 배우는 마음으로 해야 되는 거여.”

사실 해마다 기후변화가 계속되고, 날씨도 예측할 수 없어서 매번 새로운 마음으로 농사를 지었다. 잘되는 작물이 달랐고, 땅도 포실해지다가도 강퍅해지고 예측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땅을 살리는 농업을 한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열매의 양에 따라서 그 해의 농사가 잘되었는지, 못되었는지를 판단하곤 했다. 땅도 살리고 열매도 잘 나오면 좋으련만, 항상 예상을 빗나갔다. 그런데 문득 떠올려보니, 내 주위의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오신 분들은 설사 태풍이 고추의 반을 쓸어간대도 그저 낙심하지 않고, 절반을 거둘 수 있는 것에 감사드리셨다. 내 부모님도, 아랫집 할머니 댁도 “이만한 게 어디야”라고 말씀하신다. 이분들께 농사는 잘되고, 못 되는 기준이 아니라 ‘하늘이 주신 일’이기 때문에 놓을 수 없는 일이다.

언젠가 아침 겸 점심으로 얼린 떡 한 덩어리를 밭두둑에 올려놓고 밀린 호미질을 열심히 하는 우리를 아랫집 할머니께서 부르셨다. “조 간호사! 밥 먹고 일해요.” 할머니는 수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시니, 머리에 쓴 베일을 보시며 우리를 ‘조 간호사’ ‘김 간호사’라고 부르셨다. 할머니는 큰 고무대야를 머리에 이고 계셨는데, 우리 앞에 내려놓으시며 “밥 먹고 해”라고 말씀하셨다. 고무대야 안에는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돌솥밥, 김치 한 대접, 미역국, 고추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우리 딸도 싫다고 호미 한 번 잡지 않는데, 뭐가 좋다고 이렇게 농사져. 자식 같어서 밥 한 끼 해 주고 싶었어. 맛은 없어도 먹고 일해.” 그리고 이어서 할머니는 “우리 같은 사람하고 함께 살아줘서 고마워”라고 말씀하셨다. 잊을 수 없는 아침 밥상이다. 투박한 할머니의 모습에서 “와서 아침을 들라”라고 밥상으로 초대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늘이 주신 일’에 대한 소명의식으로 이 일을 하고 싶다. 더 많은 소출을 거두는 농사꾼이 아니라, 생명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다. 우리의 사고가 토마토 개수를 헤아리고, 더 큰 수박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을 넘어서, 기후위기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계속 열매를 딸 수 있다는 것에 감사드리고, 오늘 땅을 일구고 있다는 그 자체로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살고 싶다.

우리는 생태적 회심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뭔가를 잘못했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가 돌아서야 할 회심은 ‘감사와 찬미’가 아닐까? 때때로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감은 우리 앞에 있는 고마운 것들에 무뎌지게 하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그 믿음으로 우리 앞에 있는 모든 것들에 감사와 찬미를 올려드린다.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 조경자(마리 가르멜, 노틀담수녀회)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