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24주일 - 주님은 주님이십니다

(가톨릭평화신문)
▲ 함승수 신부



탈출기 3장 14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는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있는 나”라는 표현이 영어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지요. “I am that I am.” 이를 해석하면 “나는 내가 존재하는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이해하고자 할 때 다른 대상과의 비교를 통해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찾아 분석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하느님을 알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오직 당신 자신으로서 계시는 유일한 분이시기에 ‘하느님은 그저 하느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과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으시는데,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문장은 영어 성경에 “Who do say that i am?”이라고 번역돼 있습니다. 이를 해석하면 “내가 존재하는 모습에 대해 누구라고 말하느냐?”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누구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 물으신 것인데, 이 질문에는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주님은 다른 누구의 모습으로 존재하시는 게 아니라, 당신의 모습 그 자체로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누구에 빗대어 이해하려는 태도 자체가 잘못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엘리야’도, 그 어떤 위대한 예언자도 주님의 모습을 100% 완전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다른 대상과 비교하는 태도는 자신이 바라는 대로 주님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마음에서 기인하기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주님이 누구라고 생각합니다”가 아니라, “주님은 그냥 주님이십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라는 칭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구세주를 보내시어 선택받은 민족인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리라고 믿었는데,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자신들을 압제하는 이방 민족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원수를 철저히 응징하며, 율법을 어기는 죄인을 엄하게 벌주는 ‘지배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폭력이 아닌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원수의 죽음이 아닌 회개를 바라며, 죄인에게는 처벌보다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분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지배가 아니라 봉사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와 예수님께서 걷고자 하시는 메시아의 길이 서로 달라 오해의 소지가 있었기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것조차 거부하셨던 것이지요.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하는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가르침을 배척합니다. ‘메시아’는 배척당하고 무력하게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강력한 힘과 권능으로 사람들을 군림하며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라는 ‘메시아’의 모습에 주님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면서도 그분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고, 제 욕심과 바람만을 채우려 드는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은 ‘사탄’과 다를 바가 없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듣지요.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말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이용하여 내가 잘되려고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배워서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신앙의 길에 ‘왕도’란 없습니다. 욕심과 집착, 고집을 버리고, ‘십자가’라는 소명을 짊어진 채, 묵묵히 주님의 뜻을 실천하다 보면 어느 순간 하느님 나라에 다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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