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자! 파울리타 수녀의 유익한 교리여행] (23) 여행지 : 한국 교회사 2

(가톨릭평화신문)




천주교는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 어떤 매력이 있었을까요? 무엇 때문에 양반인 실학자들과 평민들이 나라에서 금지하던 서학(천주교)에 매료되었을까요? 신자들이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천주교를 신봉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천주교의 인간 평등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위계제도는 우리 마음 안에 새겨진 자연법과 상충하는 것이었지요. 복자 황일광은 천민으로 인간 대접을 못 받다가 신자들이 그를 동등하게 대해주는데 감동을 받아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럼 두 번째 한국 교회사 퀴즈 여행을 떠나볼까요?



퀴즈여행

한국 교회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1. 한국 초기 교회의 3대 지주(支柱)는 이벽과 이승훈, 또 누구인가?



2. 교회 지도자 10여 명이 스스로 신부가 되어 성사를 집행한 제도는?



3. 한국 최초의 순교자로 한국 복자들의 대표는?



4. 조선에 최초로 파견된 신부는 누구인가?



5. 천주교가 가지고 있던 어떤 사상이 조선의 위계제도와 충돌하였는가?



6. 천주교 4대 박해 중 최초의 박해는?



7. 북경 주교에게 신유박해에 대해 알리고 대책을 건의한 비밀문서를 쓴 사람은?



8. 제2대 주교(앵베르)와 선교사(샤스탕, 모방 신부), 정하상 등이 순교한 박해는?



답란



1 □일□

2 □□□제도

3 윤□□

4 □□모

5 □□사상

6 □□박해

7 황□□

8 □□박해

(정답은 ‘가이드 설명’에서 확인하십시오)



가이드 설명



1. 한국 초기 교회의 3대 지주

권일신은 복음 전파의 열렬한 사도로 충청도의 이존창과 전라도의 유항검을 입교시킴으로써, 고향 양근(경기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전라도까지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권일신은 천진암 강학회를 주도적으로 이끈 이벽,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과 함께 한국 초기 교회의 3대 지주(支柱)가 되었지요. 이벽은 세례명으로 그리스도를 조선에 전하는 선구자가 되려고 ‘요한 세례자’로, 권일신은 선교를 위하여 선교의 수호성인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로 정하였습니다.



2. 가성직제도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 이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로 퍼져있던 교회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교계제도가 생겨났습니다. 교회 지도자 10여 명(권일신,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등)은 스스로 신부가 되어 미사를 집전하고, 고해성사, 견진성사 등도 거행하였는데, 이를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고 합니다. 이는 1786년부터 약 2년간 계속되었는데, 북경 주교에게 문의한 후 주교의 권고에 의해 모두 평신도로 돌아갔지요. 이후 성직자의 부재로 어려움이 생기자 중국에 선교사 신부를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3. 제사 문제

북경 주교의 사목서한을 통해 또 알게 된 사실은 천주교가 조상제사를 금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전라도 진산(珍山)에 사는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어머니의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태웠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지요. 하지만 이들은 굽히지 않고 신앙을 증거 하다 순교하여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윤지충은 한국 복자들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이 ‘진산사건’은 천주교 신자들이 그 당시 국교인 유교를 포기하고 천주교 신앙을 택함으로써 고난을 받았기에,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박해라고 할 수 있지요.



4. 조선에 최초로 파견된 신부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의 결과,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794년 말 조선에 최초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최인길이 마련해 준 한양의 집에 머무르며 우리말을 배웠고, 이곳에서 이듬해 최초의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거행하였지요. 6월에 중국인 신부의 입국 사실이 고발되어, 윤유일, 지황, 최인길은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키며 대신하여 순교하였는데, 이를 ‘을묘실포사건’이라고 합니다. 주 신부는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해 6년간 숨어서 사목활동을 하였지요.



5. 박해의 요인

천주교 박해의 요인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면이 있었으나, 다음의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사상적 요인: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똑같은 품위를 가진다는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전통적인 위계제도(양반, 중인, 상민, 천민)와 충돌함 ②관습적 요인: 조상을 기리는 제사를 교황청에서 우상숭배로 여겨 이를 금지함 ③정치적 요인: 천주교 신자를 억압하기 위한 당파싸움 또는 정치적으로 이용됨(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



6. 최초의 대(大) 박해

조선 최초의 대대적이고 전국적인 박해는 신유박해(1801년, 순조 1년)입니다.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이 시작되어, 이승훈, 권철신, 정약종, 이가환 등 남인과 주문모 신부, 강완숙이 처형 또는 옥사했고 정약전, 정약용 등이 유배되었습니다. 척사윤음(斥邪綸音, 천주교를 사학으로 단정하여 배척하도록 임금이 내리는 말씀)으로 끝이 났는데, 여기에 나오는 오가작통법(5가구로 묶어, 천주교 신자가 한 집이라도 나오면 5가구 모두 벌함)이 실시되어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았지요.



7. 황사영 백서

황사영(알렉시오)은 중국 교회 북경의 주교에게 혹독한 신유박해의 현황과 그 대책을 건의하는 글을 백서(흰 비단)에 적어 밀사를 통해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그와 관련자들이 모두 처형을 당했습니다. 처(정난주)는 제주도로 귀양을 가면서 갓난아기였던 아들(황경한)을 살리려고 추자도에 몰래 내려놓고 생이별을 하였지요. 백서는 조정을 분노시키면서, 천주교를 더욱 탄압하게 만들었습니다.



8. 기해박해

주문모 신부의 순교 후 정하상(바오로)이 1816년부터 북경을 왕래하면서 신부 영입을 추진한 결과, 1831년 조선이 북경 교회로부터 독립된 교황감목대리구로 설정되면서 주교가 파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제1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불행히도 병사하여, 대신 제2대 앵베르 주교가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와 함께 입국하였지요. 천주교에 관용적이던 안동 김씨(시파)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던 풍양 조씨(벽파)가 대대적인 기해박해(1839년, 헌종 5년)를 일으켰는데, 이때 위의 성직자들과 정하상, 유소사, 정정혜, 유진길, 유대철, 조신철 등 수많은 신자가 순교하였지요.

참조) 현석문이 기록한 「기해일기」(순교자들의 전기)로 인해 이때의 순교자 70위가 빨리 시성되었다.



여행옵션 : 서소문 순교 성지(서울)

서소문 순교 성지는 103위 성인 중 44위, 124위 복자 중 27위가 순교한 한국 최대의 순교지이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 시대 사형 집행지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이곳에서 가장 먼저, 가장 많은 신자가 처형됐다. 확인된 순교자가 100명이 넘는다.

성지에는 1984년 시성식과 함께 세운 순교자 현양탑이 새롭게 건립되어 있고, 성지 옆에는 1891년 서울 두 번째 본당,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 건물(고딕식)로 설립된 약현 성당이 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 성지를 방문한 이후로 본격적인 공사가 이루어져, 2019년 서소문성지 역사공원(지상),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지하)을 개관하였다. 2018년 교황청에서는 서소문 순교성지가 포함된 천주교 서울 순례길을 아시아 최초 국제 공식 순례지로 지정하였다.



여행 기념품



천주교 박해의 요인 중 하나는 사상적 요인으로 조선 시대 철저한 신분 계급 사회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양반, 중인, 상민, 천민)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똑같이 동등하며, 서로 형제자매라는 사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킬 수 있는 고귀한 신앙의 진리였지요. 오늘날 내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고귀하게 지키고 싶은 가톨릭 교리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마리 파울리타 수녀

노틀담 수녀회 교리교재 연구소



바로잡습니다 ▲본지 2021년 9월 5일 자(1628호) 16면 교리여행 퀴즈여행 7번 질문 중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된 사람은?’에서 ‘순교자’를 ‘증거자’로 바로 잡습니다. 이는 제작 과정에서 잘못 수정한 오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