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논리, 무상의 논리

(가톨릭평화신문)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이 말씀은 교회 내에서 봉사하는 분들뿐 아니라 유용성(有用性)을 가장 높은 가치로 삼는 우리 사회에 많은 생각 거리를 준다.

사심 없이 봉사한다는 것,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보답이 있어야 움직이고, 보답이 없으면 서운해하는 우리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기쁠 때는 보답을 받았을 때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봉사했을 때가 아닐까.

부모는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를 보고 기뻐한다. 보답을 기대하며 아이에게 사랑을 쏟지 않는다. 아이의 웃는 모습 하나로 아이를 키우느라 마음 졸이던 순간, 애쓰던 마음, 고통스러운 기나긴 밤들, 그 모든 노고와 힘겨움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거저 줄 때, 보답을 바라지 않고 줄 때 얻어지는 기쁨이 있다. 그것은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다.

사제 양성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신학생들이 신학교 양성과정을 마치고 사제로 서품되는 순간이다. 가장 낮은 모습으로 땅에 엎드려 기도드릴 때, 제의를 입고 제단에 올라 미사를 집전할 때. 그저 성장해준 학생들에 고마워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무상성(無償性)·보답을 바라지 않고 거저 베풀어줌,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이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가치이자 덕목이 아닐까 한다. 지금 시대는 모든 것이 경제라는 잣대로 판단되는 시대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하는 모든 일뿐 아니라 사람조차도 경제 논리로 판단한다. 내가 받았으면 돌려줘야 하고 주었으면 받아야 한다. 이자까지 쳐서 더 받아야 한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 삶을 인간답게 지켜주는 것은 경제 논리가 아닌 사랑의 논리, 무상의 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 삶에 활력을 주는 것은 마음을 담은 작은 배려, 작은 관심, 작은 말 한마디일 것이다. 그것은 돈이 들지 않지만, 사람을 기쁘게 하고 상처 입은 사람을 치유하고 살아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것은 보답을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건네는 사랑이며 베풂이다.

이는 하느님과의 관계에도 연결된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힘이 빠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없어지며 남에게 의지해야 한다. 조금씩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자신을 보면 의욕이 사라지며 삶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유용성으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살아온 삶만큼 값을 쳐주신다. 수고한 삶을 축복해주시고, 허물로 얼룩진 삶은 씻어주신다. 어쩌면 우리는 쓸모없는 존재가 됨을 경험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더 갈망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더 잘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쓸모없는 존재를 필요로 하신다. 그들 안에서 더 큰 힘으로 활동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쓸모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지 못한다. 쓸모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은 늘 하느님께 열려 있고,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이 가진 작은 것을 나누고 베풀 줄 안다. 하느님께서 쓸모없는 존재를 사랑하시는 이유다.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 이것이 오늘의 고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눈떠야 할 가치가 아닐까. 우리가 쓸모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니다. 소중한 존재이기에 하느님 눈에 기쁨이 되며 쓸모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눈으로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한민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