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차별의 악순환 끊는 첫걸음

(가톨릭평화신문)
우리는 타인의 시선·구별 짓기 문화 속에서 진정한 나와 상대·본질을 바라보며 사는가? 나의 가치를 내가 가진 것에만 두진 않는가? 한 시민이 서울의 고층 아파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뉴시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우리는 본능처럼 공통점을 찾으려 한다. 고향·학교·취향?. 몇 마디 질문 속에서 ‘나와 닮은 무엇’을 발견하려 애쓴다. 특히 상호의존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 연결의 욕구는 더 강하다. 그러나 연결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 우리는 동시에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심리적 거리를 계산한다.

미국 프린스턴대 신경심리학자 마이클 그라치아노는 인간이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개인 공간까지 설정하며 살아간다고 말한다. 적정한 거리가 지켜질 때 편안함을 느끼지만, 그 경계가 침범되면 위협과 불쾌함을 경험한다. 상대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거절과 상처가 뒤따르기에 우리는 미리 방어막을 친다. 그래서 우리는 학력·직장·재산·외모 같은 기준으로 상대를 분류하며 ‘안전 거리’를 확보하려 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브르디외가 말한 ‘구별 짓기(distinction)’는 이 심리를 사회 차원으로 확장한다. 사람들은 단순히 필요에 따라 물건을 소비하지 않는다. 취향을 통해 자신이 속한 집단을 드러내고, 그 집단의 위계를 유지한다. 클래식 음악을 듣고, 와인을 즐기며, 전시회를 찾는 선택은 단순한 취향을 넘어 구별의 신호가 된다. 교육·언어·매너는 물론, 우리가 좋아하는 커피 브랜드까지 은밀한 우열의 표지가 된다.

한국 사회는 구별 짓기가 실제로 작동하는 실험장이기도 하다. 강남과 강북, 국내와 국외, 지방대와 명문대, 특정 브랜드에 대한 뚜렷한 선 긋기까지. 청년들의 ‘인싸’ 문화, 직장인의 회식 방식, 주부들의 자녀 교육 네트워크까지 각자 영역에서 소속감과 차이를 동시에 만들어낸다. 디지털 세상은 이 구별을 한층 더 정교하게 가공한다. SNS에 올린 여행 사진·브런치 카페·운동 인증샷은 새로운 형태의 문화자본이 된다. 팔로워 수, ‘좋아요’ 개수, 해시태그의 조합까지, 나와 타인을 구별하고 재단하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문제의 본질은 물건이나 경험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 그리고 그 시선을 내면화한 나 자신에 있다. 명품이 없다고 슬플 일도, 외제 차가 없다고 부끄러울 일도 없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불안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자기 가치를 재단하게 만든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말투와 표정이 달라지고, 상사 앞과 동료 앞에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 구별 의식의 그림자다.

구별은 결국 사회구조 속에서 차별로 연결된다. 맥스 루카도의 그림책 「너는 특별하단다」에서 웸믹 나무 사람들은 잘하는 이에게 금빛 별표를, 부족한 이에게 회색 점표를 부여한다. 주인공 펀치넬로는 몸 가득 점표를 달고 우울해한다. 그러나 별표도 점표도 없는 소녀를 만나면서 깨닫는다. 표가 힘을 갖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스스로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을. 현실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표를 매일 주고받으며, 그것이 실제 기회와 대우의 차별로 굳어지기도 한다.

물론 개인의 선택만으로 이 구조를 완전히 뒤집기는 어렵다. 그러나 작은 알아차림의 의식이 시작이 될 수 있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금빛 별표나 회색 점표를 붙이려 할 때 잠시 멈추어 묻는다. 나는 무엇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으로 나를 드러내려 하는가? 그것이 진짜 나의 필요인가, 아니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불안인가?

타인을 평가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을 견디는 용기,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와 타인을 받아들이려는 선택. 이것이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는 힘이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되 그 다름이 우열의 벽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한다. 구별 짓기가 차별의 사슬로 굳지 않는 세상은 바로 여기, 나의 작은 알아차림에서 시작된다.


<영성이 묻는 안부>

우리 사회 곳곳에는 구별이 곧 차별로 굳어지는 장면이 드러납니다. 서울 강남과 강북의 아파트값 차이는 단순한 지역 격차를 넘어 교육과 기회의 서열을 만들어 냅니다. 젊은 세대가 말하는 금수저·흙수저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점표가 붙어 있다는 체념을 보여주지요. 학교 안팎에서 ‘인싸’와 ‘아싸’를 가르는 문화, 학부모들의 학군 집착도 마찬가지입니다. 집값과 명문학교 진학률이 맞물리면서 부모들은 ‘어느 지역에 살아야 아이가 유리한 조건을 갖출 수 있다’는 압박을 체감합니다. 흔히 부모들이 하는 말처럼 ‘남들 다 하는데 어떡해요?’라는 불안이 그 선택을 부추기고, 다시 서열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만들지요.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력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회 전체를 바꾸기는 어렵더라도 내 마음의 방향은 바꿀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내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는 것. 내가 붙이는 작은 표 하나가 누군가의 삶을 규정하지 못하도록 나만의 시선을 지키는 것, 이것이 차별의 사슬을 끊는 첫걸음입니다.

“누가 그대를 남다르게 보아 줍니까?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1코린 4,7)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받은 것임을 기억할 때 금빛 별표도 회색 점표도 힘을 잃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리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