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손자, 따로 또 같이 희망을 그리다

(가톨릭신문)

 

동양화가 할머니와 자폐성 발달장애를 지닌 팝아트 작가 손자의 특별한 전시회가 열린다. 청림 허옥순(클라라·서울대교구 석촌동본당)과 정도운(엘리야·서울대교구 세곡동본당) 작가가 그 주인공.

 

 

허 작가는 오래전 자신의 얘기로 운을 뗐다. “50대 중반 무렵에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어요. 몸이 아프다 보니 마음에도 병이 나더라고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죠. 그때 눈앞에 나타난 게 그림이었어요.”

 

 

신문에 난 ‘사회교육원 사군자반’ 광고 하나만을 보고 전북 전주에서 서울 홍대까지 올라와 처음 손에 붓을 쥐었다. 쉬이 오가기 힘든 먼 거리임에도 고통을 잊기 위해 그림에 매진하니 어느덧 몸과 마음의 아픔도 나아져 지금까지 흘러왔다.

 

 

그 사이 손자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로 자랐다. 좋아하는 그림을 실컷 그릴 수 있기를 희망한 가족의 바람에 따라 미술고에 진학해 한국화를 전공할 수 있었다. 졸업 이후 강남장애인복지관, 잠실창작스튜디오 등 기관의 청년 예술가 육성 프로그램 등을 통해 예술가로서 자립하고 있는 정 작가.

 

 

그렇게 각자의 그림 세계에 빠져 시간을 보낸 둘이 이제 동료 작가로서 합동 조손전을 연다.

 

 

허 작가의 작품은 실재 경관을 담은 진경산수화를 비롯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과 식물 등이다.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하느님을 체험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림을 본 사람들이 ‘그림이 살아 있는 것 같다’고 말해 줄 때가 가장 행복해요.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제 손으로 직접 그리면서 그 섭리와 감사함을 느끼죠.”

 

 

정 작가는 주로 톡톡 튀는 색감을 바탕으로 자신이 만나 보고 싶은 가수와 배우의 모습을 담은 팝아트 작품을 그린다. 인물 옆에는 앨범 트랙 리스트, 필모그래피 등을 빼곡히 적는다. 단순한 인물 그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한 것이다. 최근에는 할머니가 그린 자연 그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또 개인 SNS를 통해 관객들과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주고받기도 한다. 그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것.


 

 

35여 년 동안 쉼 없이 달려온 허 작가의 그림 시계는 아쉽게도 잠시 멈춘 상태다. 황반변성으로 인해 더 이상 그림을 그리기 어려워진 것. 그럼에도 허 작가는 “자신만의 그림으로 길을 개척하고 있는 손자가 있으니 기쁜 마음뿐”이라며 “그간 그린 작품들을 손자와 함께 선보일 수 있어 기대된다”고 밝혔다.

 

 

“힘든 시기에 그림으로 치유 받고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었다”고 말하는 할머니와 “그저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 재밌다”고 말하는 손자. 80대와 20대, 여성과 남성, 비장애인과 장애인. 접점이라곤 없어 보이는 이들은 ‘그림’이라는 희망으로 연결돼 있었다.

 

 

‘할머니와 나’를 주제로 하는 두 작가의 전시는 12월 1일부터 7일까지 서울 강남구민회관 전시실에서 만나 볼 수 있다.


 

 

 


황혜원 기자 hhw@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