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하느님, 예수님 그리고 우리

(가톨릭신문)

사제에게 강론 준비는 가장 소중한 직무이지만 벗을 수 없는 멍에라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멋진 글과 말을 통해서’ 단번에 신자들을 감동시키고 싶었던 새내기 사제 시절엔 그 무게감이 만만찮았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오늘의 복음에서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구절이 해방감을 선물해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 모자람을 인정하고 제 수준을 존중하며 제 꼴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느껴졌던 것입니다. 이후 저에게 강론 준비는 기쁨의 작업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강론은 사제가 체험한 삶의 기쁨과 감사를 나누는 일이며 광활한 당신 천국의 영역을 신자들과 함께 엿보는 즐거운 작업이 된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도 난해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심오하고 골 아프게 ‘공부’ 시키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저 제가 느낀 바를 솔직히 나누려 합니다. 더러 무겁고 혼돈스럽게 여겨지는 ‘신비’라는 단어가 주는 중압감을 벗겨드려서, 늘 친근하고 진솔히 다가오시는 주님과의 조우를 돕고 싶은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삼위일체의 주님을 이해(?)하게 된 ‘터닝 포인트’를 들려드리고 싶은데요. 저에게는 신학생 시절, 깊은 사색에 잠긴 듯한 녹색 눈빛의 독일인 교수 신부님께 들은 얘기가 강렬한 봄날의 기억으로 뇌리에 박혀있습니다. 그 수업 이후, 저는 더 이상 삼위일체가 난해한 하늘의 신비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우리 삶에 각양의 축복을 주고 계신 주님의 마음이며 손길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는데요.

교수 신부님께서는 성령하느님은 “아주 수줍음이 많다”는 뜻밖의 표현으로 저희를 놀라게 했습니다. 하물며 성령은 자신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는 설명을 곁들이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한마디로 성령께서는 오직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더더욱 예수님께만 집중하게 만든다는 뜻이었지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오시되, 더더더 성자이신 예수님과 친해지도록 이끌어 주실 뿐이라는 해석이 명료했던 덕일까요? 그러기에 성령인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을 자랑하며 앞세우게 된 다시던 차분한 어조도 여태 생생하군요.

무엇보다 그 수업의 결정타는 성경을 읽어야만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이었는데요. 성령이 오신 목적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음을 이해하도록 하여 예수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결국 스스로 성령을 받았다면서 성령에 관해서만 떠들어댄다면 실제로 성령의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며 우려 섞인 표정을 지으셨지요. 성령께서는 당신께서 임하셨다고 눈에 띄는 특별한 자격증을 주지는 않지만 복음에 절대적 순명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기에 성령을 받으면 복음적 삶에 순명하고 헌신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신비는 자신은 숨고 서로를 드러내 높이는 것입니다.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는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선물하시는 당신의 생명이 바로 ‘성령’이시며 성령은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니까요. 성경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인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아들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해주셨다고 밝히는 이유일 텐데요. 더불어 성령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하는 힘입니다. 이 사실은 사도행전에서 분명히 깨닫게 되는데요. 그때, 제자들이 행한 일 전부가 성령께서 하신 일이니까요.


이렇듯 말씀은 우리의 행위가 진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 진리를 추구할 능력을 선물해줍니다. 말씀이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이야기할 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쏟아주십니다. 말씀이 하느님께 순종하라고 하실 때, 성령은 그 길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한마디로 말씀은 하느님의 성품을 기술하여 들려주는 반면, 성령은 우리들이 하느님을 느끼도록 하십니다. 이러고 보면 삼위의 위격이 쉬이 구별되지 않나요?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나에게 오신다는 사실을, 결코 누군가에게 오신 것과 같은 방법으로 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야말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누군가를 흉내 내며 살아가는 걸 원치 않는다는 사랑의 고백이시니까요. 이 모습 이대로의 나를 사용하시겠다는 은총의 귀띔이시니까요. 우리에게 임하는 성령하느님께서는 늘 새롭고 독특하며 신선하게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십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내가 가장 나답게 살아가도록 도우십니다. 진리의 자유입니다.

결코 신학적이지 못하고 울퉁불퉁해서 조심스러운 이런 저의 생각은 어느 날, 창세기의 첫 구절에서 속 시원히 정리가 되었는데요. 성경은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소식을 전하면서 “하느님의 영”을 가장 먼저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가운데에서 인간에게만 하느님의 영이 “생명의 숨”으로 불어 넣어진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어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여 죄인으로 전락하게 되는 수모의 과정을 들려주는데요.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다”(로마 5,12)는 역사의 현장으로 초대해줍니다.

그 말씀이 저에게 모든 진리가 드러나는 신비의 통로로 다가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원죄가 후손들에게 자자손손 세상 끝날까지 이어질 것을 천명한 이면을 들춰 본 느낌이었다라고 할까요? 아담에게 불어 넣어진 주님의 숨결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 내재해 있음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라고 할까요?

때문에 성경이 신앙의 훌륭한 선조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할 때에 “아담이야말로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 위에 있다”(집회 49,16)고 결론 내린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아담과 그리스도”(로마 5장 참조)를 비교하는 열정적인 글을 썼던 이유도 짚어졌습니다. 마침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죄에 넘어간 인간의 허약함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된 은총에 감격하여 “오 복된 죄여!”라고 고백했던 것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삼위일체의 신비는 감히 죄 많은 인간이 주님과 한마음 한 몸을 이루어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고자 새 삶으로 단장하도록 돕는 ‘은총’입니다. 주님과 한 몸이 된 우리가 주님과 한마음이 될 때, 사랑의 삼위일체에 흡수될 것이란 약속입니다. 마침내 ‘나와 너’의 가림막을 부수고 ‘우리’가 될 때에 성령 안에서 우리 모두는 삼위일체의 주인공이 될 것이란 예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새겨야 할 복음은 삼위일체 사랑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진리를 절실하게 ‘느끼는’ 일이라 싶습니다. 말씀을 ‘깨달아’ 간직하는 일이라 싶습니다. 하여 주님 안에서 복음을 ‘살아내는’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을 수줍음이 많으신 성령께서 힘껏 돕고 계시니 미지근한 믿음에서 탈출하시길 사제의 권한으로 강권합니다. 힘찬 도약으로 하느님과 예수님과 일치하는 성령의 믿음인으로 성장하시길 마음 모아 축원합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